이명박 대통령은 2일 "광우병과 관련해 국민들이 안심할 수 있도록 실상을 정확하게, 적극적으로 알릴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고 이동관 청와대 대변인이 밝혔다.
이 대통령은 이날 오전 청와대에서 조찬을 겸해 열린 강재섭 한나라당 대표와의 정례회동에서 이 같이 말했다. 미국산 쇠고기 수입재개 협상에 따른 비난여론과 광우병에 대한 우려가 광범위하게 확산되고 있는 상황에서 적극적으로 논란의 진화에 나서겠다는 의지의 표현으로 해석된다.
"일각의 여론몰이…상당한 정치적 의도 있다"
특히 이 대통령은 "이 문제에 정치적인 논리로 접근해서 사회적 불안을 증폭시켜서는 안 된다"며 "정부뿐 아니라 당 쪽에서도 국민들의 실생활과 직결된 사안인 만큼 적극적으로 정확한 실태를 알리는 데 나서달라"고 당부했다.
여기서 항상 궁금했던 것.
"정치(적인) 논리로 접근한다"는 말이 도대체 무슨 말일까?
구글에서 "정치논리"로 검색해 보니 약 3,860,000개 결과란다.
검색 초기화면에는
정치논리에 고배마신 방카슈랑스
국민건강권을 정치논리로 폄하해서야
"미국 쇠고기 안 먹겠다는 건 정치논리"
"쇠고기 협상 양보했다는 건 정치논리"
이대통령 "한미관계 이념 정치논리에 왜곡"
검색은 그렇다 치고, 정치논리의 뜻은 무엇인가?
정치논리와 경제논리
-安國臣(중앙대 교수) -
새해 초부터 정치권이 부산하다. 4월 총선을 의식하여 내각이 대폭 개편되고 제 1여당은 신장 개업했다. 제 2여당과 야당도 명망가들을 영입하느라 바쁘다. 시민단체들이 국회의원 후보 부적격자들을 공표하고 낙선운동까지 펼 기세다. 이래저래 선거의 열풍이 거세게 불어닥칠 전망이다.
이런 정치의 계절엔 경제가 으레 정치논리에 휘둘려 왔다. 예전같이 심하지는 않지만 이번에도 그럴 기미가 곳곳에서 감지된다.
경제가 정치논리에 휘둘린다고 말할 때에는 정치논리는 나쁘고 경제논리는 좋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 이는 물론 잘못된 전제이다. 정치논리라는 말은 으레 부정적으로 쓰이고 있지만 긍정적인 큰 뜻도 엄존한다. 경제논리는 옳은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 그릇된 것도 있다.
지난 2년간 우리 정치는 그전보다 더 서로 물고 헐뜯으면서 끝없는 정쟁에서 헤어날 줄 몰랐다. 여야가 서로 자기네 정치적 입지를 위해서는 물불을 가리지 않는 「까마귀골의 4류정치」행태를 보여 온 것이다.
이 때문에 국정감사와 예산심의가 깊이있게 다루어지지 못하고 개혁 법안들이 제 때 제대로 만들어지지 못했다. 즉, 정치가 경제의 발목을 잡았다. 부정적으로 쓰이는 정치논리는 이런 도를 지나친 파당적 이해타산을 일컫는다.
그러나 정치논리에는 대승적인 차원도 있다. 그것은 사회정의와 공공선이다. 사회적불평등이 크고 공익이 위협받을 때 사회정의와 공공선을 세우는 것은 정치의 기본책무이다.
경제논리는 물론 효율을 중시하는 것이다. 그러나 효율만을 앞세워 형평을 도외시하는 것은 그릇된 경제 논리이다.
우리나라는 효율만을 앞세워 1960년대부터 성장제일주의 기조를 유지해 왔다. 하지만 성장제일주의가 국민복지를 극대화시키는 최적성장이 아니라는 것은 이미 1960년대에 밝혀진 사실이다. 성장제일주의 때문에 대내외 균형과 형평이 깨져 금융위기와 외환위기를 맞은 것이다.
안정과 형평을 갖추면서 효율을 추구하는 것이 참된 경제논리이다. 참된 경제논리는 큰(대승적인) 정치논리와 연결된다. 안정과 형평은 사회정의의 기본전제이기 때문이다.
새 경제팀은 4대부문 개혁의 완수, 안정적 성장기조 유지, 소득분배구조 개선, 생산적 복지체제 구축 등을 경제정책방향으로 밝혔다. 표방하는 방향은 참된 경제논리와 큰 정치논리가 합쳐진 올바른 것이라고 평가된다.
문제는 구체적인 정책수단이다. 정책방향을 옳게 세워도 정책수단을 재량껏 쓰면 결과가 왜곡되기 때문이다. 이런 돌연변이의 가능성을 경제학에서는 「최적정책의 동태적 비일관성」이라고 부른다. 재량정책을 쓰는 그 시점에서 보면 최적인데 지나놓고 보면 최적이 아니라는 것이다.
지난 2년 동안 김대중 정부는 과거 어느 정부 못지 않게 이런 재량정책의 신기루에 빠져 왔다. 빅딜과 채권시장안정기금이 단적인 예이다. 빅딜을 추진하고 안정기금을 급조하는 당시에는 이것들이 불가피한 정책수단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화끈한 약효는 잠깐이고 벌써 정부의 멍에가 되고 있다.
경제팀이 9%대의 장기금리에 집착하는 것도 충정은 이해가 되지만 무모하다. 경제성장 률과 물가상승률의 합이 두 자리수가 된다면 금리를 9%대로 묶는 것이 어렵고 바람직하지도 않다.
개혁이나 시장안정을 내세워 정부가 경제에 직접 개입하는 것은 이제 지양해야 한다.
공정하고 투명한 제도적 장치를 통해 개혁과 안정을 유인해야 한다. 선거를 의식하여 선심정책을 남발하거나 주식·채권시장을 인위적으로 떠받치는 등 작은 정치논리에 매이는 일이 없어야 한다. 예전 정권이 이런 수법을 남용하여 이제 식상한 메뉴가 되었기 때문에 득표에 별 도움도 안된다. 재정적자와 시장왜곡의 부머랭으로 돌아와 경제가 멍드는 부작용은 크다.
참 경제논리는 재량정책의 신기루에 빠지지 말라고 가르치고 있다. 우선 먹기는 곶감이 달지만 나중에는 충치와 변비가 생긴다는 것이다. 참 경제논리를 따를 때 사회정의와 공공선을 밝히는 큰 정치논리도 지속적으로 관철될 수 있다. 정책방향 뿐 아니라
구체적인 정책수단도 큰 정치논리와 참 경제논리로 일관성있게 밀고 나가는 것이 새천년에 정부가 할 일이다.
/서울경제 송현칼럼
[장하준--시론] 정치논리와 시장논리
‘시장’서 ‘정치’ 배제해야하나
정책이 시장결점 보완해야
97년 외환위기 이후 구조조정 과정에 우리 정부가 적극 개입하는 것과 관련, 많은 사람들(특히 외국투자가와 외국 언론기관)이 우리나라의 경제정책 수립과 집행에 있어 ‘정치논리’가 ‘시장논리’를 앞서는 것은 문제라고 지적한다.
이들은 경제 운용과정에서 정치논리는 철저히 배제되어야 하며, 이를 위해서는 규제(규제)완화와 개방을 통해 시장영역을 확대함으로써 정치인과 관료들이 개입할 수 있는 영역을 최소화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60년대 이후 80년대 말까지 정부 주도의 경제발전 전략을 추구하면서 그 부작용을 경험했던 우리나라의 입장에서는 참으로 매력적인 주장이다.
그러나 필자는 시장논리와 정치논리는 항상 명확히 구분될 수 없으며, 또한 경제 운용에 있어 정치논리를 완전히 배제하는 것이 항상 옳은 것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왜 그런가? 몇 가지 예를 들어 설명해 보자.
19세기 말 영국 등 유럽 정부들이 당시 탄광 및 방직공장 등에서 성행하던 아동 노동을 금지하려 하자, 일하고 싶어 하는 어린이들과 그들을 고용하고자 하는 고용주들 간의 자유로운 계약을 정부가 막는 것은 반시장적(반시장적)인 행위라며 이를 반대한 사람들이 많았다.
그러나 오늘날 이 나라들에서 볼 수 있듯이 정부가 아동을 고용한 고용주를 처벌한다고 해서 정치논리가 시장논리를 앞섰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다. 사회정의의 개념과 고용 관행이 그 사이에 완전히 바뀌어 이 나라 국민들은 이제 어린이들을 더 이상 노동시장에의 정당한 참여자로 보지 않기 때문이다.
시대의 변화와 사회 여건, 그리고 사고(사고) 방식의 변화에 따라 시장논리와 정치논리 간의 경계선이 바뀌었던 예는 무수히 많다.
지금은 누구나 당연시하지만, 중앙은행 제도와 기업의 유한(유한) 책임제도 등이 19세기 후반 처음 도입되었을 때, 많은 사람들은 이 제도들이 은행이나 기업가의 ‘도덕적 해이(Moral Hazard)’를 가져와 시장논리를 해친다며 반대하였다.
이후 도입된 독과점 규제, 금융시장 규제, 재정적자를 통한 경기부양, 공공근로사업, 누진세를 통한 소득재분배(재분배) 등의 정책들도 처음에는 시장논리에 역행하는 것으로 비난 받았다. 그러나 이제는 흔히 자유방임주의의 귀감으로 여겨지는 미국 정부도 일상적으로 집행하는 정책들이 되었다.
우리 정부가 과거 많이 사용하였던 산업정책도 정치논리에 기초해 시장논리를 거스르는 것으로 보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저명한 경제학자인 스티글리츠(Stigliz) 세계은행 부총재 등은 이러한 정책이 잘만 집행되면 시장의 결점을 보완하는 친시장적(친시장적)인 것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이러한 예들이 보여주는 것은, 시장논리와 정치논리의 경계(경계)는 흔히 생각하듯이 절대적인 것이 아니며, 시장여건에 따라 그리고 시장을 보는 시각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이다.
어느 시대와 어느 사회에서도 통하는 절대적인 시장 논리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특정한 사회에 있어 시장논리와 정치논리를 구분하는 구체적인 경계선은 어떻게 그어져야 하는가?
그것은 궁극적으로 그 사회 구성원간의 정치적인 합의에 기초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시장논리가 낳은 어떠한 결과를 놓고, 민주적 의사 취합과정을 통해 사회의 구성원들에 의해서 그것이 만족스럽지 못하다는 결론이 내려지면 그 결과는 정치논리에 의해 수정될 수 있고 또 수정되어야 하는 것이다.
시장이라는 것은 사회복지를 고양(고양)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일 뿐이지, 그 자체가 목표가 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조선일보 1999.9.29 [출처] [장하준--시론] 정치논리와 시장논리 |작성자 한 강
결국 이명박 대통령이 그렇게도 싫어하는 정치논리의 반대에는 경제논리, 시장논리가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그럼..
미국 쇠고기 안 먹겠다는 것이 경제논리인가, 정치논리인가?
광우병의 위험을 지적하고 광우병으로 인하여 들어갈 사회적 비용을 생각하고, 그러한 비용을 생각할 때 수입을 금지하는 것이 가장 합리적인 것으로 생각한 결과로 소고기 수입을 반대한다면, 이러한 태도도 정치논리인가?
도대체 반대만 하면 정치논리라고 하니, 경제논리는 찬성논리인가?
요즘 대통령 입에서 정치논리라는 말이 안 나오면 정말 이상할 것 같다.
앞으로도.
아마 5년간은 정말 유행할 것 같다.
Posted by Min H.

